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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모양

잊힌 성좌 아래

 

 

 

잊힌 성좌 아래

                                           남기영 

 

그 밤,
별빛조차 숨을 멈춘 시간
안개 너머, 폐허가 된 성이 있었어.
성벽은 오래전에 무너졌고
그 안의 정원은
서리와 무관심의 비로 잠든 채
차가운 시간 속에 고여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 새가 날아들었어.
그녀는 별가루를 날개 끝에 매단 채
말없이 성벽 위에 앉았지.
바람이 이름을 물었고
달빛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녀는 끝내 침묵했어.
마치 모든 말이,
그녀에게는 이미 부서진 유리처럼
아무 쓸모도 없다는 듯.

 

그녀는 그림자만 따라다녔고,
자신의 지나온 발자국에만
고요히 눈물을 뿌렸어.
깨어진 유리조각을 품에 안은 채,
잊힌 상처를 다시 껴안고 있었지.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심장은
어느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았어.
내가 건넨 빛의 물은
언제나 조용히 바닥에 스며 사라졌고,
그녀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곤 했지.

 

나는 무너진 탑의 나팔꽃처럼
금이 간 벽을 타고
그녀의 창문까지 닿으려 했어.
햇살을 데려가려 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창을 닫았고
내 꽃잎은 이름도 없이
바람에 찢겨 사라졌지.

 

그리고,
달의 결이 더욱 옅어진 어느 밤,
그녀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사라졌어.
말 한 마디 없이,
은빛의 숨결이 되어 공기 속에 흩어졌지.
남겨진 건
휘청이는 먼지와
아직 식지 않은 온기뿐.

 

며칠 후,
어둠과 안개가 입맞추던 저녁,
익숙하지 않은 실루엣 하나가
무너진 성의 잿빛 계단을 밟았고
그 순간, 나는 알았어.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의 이름은,
나는 이야기에서 지웠어.
그건 어떤 주문보다 강한 침묵이었으니까.
이름은 때로,
운명보다 무거운 것이니까.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짓기 위해 떠났어.
무너진 탑의 잔해 위에
나만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별들이 스러지는 동쪽 끝,
검은 물 저편,
그 누구의 기억도 닿지 않는 곳으로
나는 나아가고 있어.

 

그곳에서,
나는 다시 나의 이름을 부를 거야.
다시는 침묵하는 자를 쫓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림자에게 사랑을 바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잊힌 성좌가 다시 떠오를 밤,
사랑은 나를 위한 불꽃이 되어
모든 어둠을 조용히 태우겠지.